고창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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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회맹단

관광지 주소, 운영시간, 주차시설 등 상세정보 안내
주소 전북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운영시간
휴무일 -
이용요금 -
주차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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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남당 회맹단

분야 : 종교/유교, 문화유산/유형유산

유형 : 유적

지역 : 전북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시대 : 조선/조선후기

설명 : 

남당 회맹단은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蔡弘國)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선비들이 구국의 기치로 호남 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92명의 의사(義士)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壇)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血盟)을 하였다.



이들은 혈맹단 앞에서 훈련도 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출병을 하였으며,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창의한 뒤 출전(出戰)을 하여 배풍령(培風嶺), 장등원(長嶝原)을 거쳐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23일간의 격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혈맹단은 전국 유일의 충혈(忠血)이 깃든 곳으로, 유림과 유족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채홍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이고, 본관은 평강으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이며 채치의(蔡致義)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에 부안에서 출생하였고, 흥덕 남당마을에 이거(移居)하였다. 채홍국은 키가 컸으며, 힘이 출중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충의대절(忠義大節)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에 격분(激憤)하여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창의하였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던 고경명이 전사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8월 1일에 흥덕 남당마을에서 다시 창의하여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과 함께 혈맹을 하고 서해안으로 출병하여 사수함으로써 이웃 고을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에 권율이 위로의 서신을 보내 칭송하였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200석은 기효증(奇孝曾)을 시켜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고 100석은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 군중에 보냈다. 적이 순천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하여 석보(石堡)에서 대파하여 이 공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또 정유재란에 창의하여 적을 흥덕 배풍령에서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23일간 전투 끝에 아들 채명달, 채경달과 함께 분전하였음에도 세 부자 모두가 순국하였다. 이에 셋째 아들 채영달이 부형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의 증직과 함께 정려(旌閭),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고덕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초명은 덕봉(德鳳),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본관은 장흥으로 고응진(高應軫)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에 고창군 신림면[현 흥덕면 제하리] 고려곡(高麗谷)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금산에 달려가니 족형(族兄)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장 채홍국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혈맹을 맺고, 맹주장(盟主將)에 추대되어 군기(軍紀)를 정돈하자 많은 의병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적을 잡아 죽이지 않고 석방을 유인하는 책략을 역이용하여 크게 이겨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맹주장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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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회맹단

전북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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